개성은 고려 500년의 역사가 살아있는 역사문화유적의 도시로 서울에서 불과 70km 거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선죽교, 고려성균관, 박연폭포 등 다양한 역사유적과 명승지가 있습니다.
개성관광은 육로를 통해 북측도시의 역사문화 유적지와 명승지를 관광함으로써 남북교류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고, 개성공단사업과 연계함으로써 민족화해와 협력을 활성화하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개성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고려(918~1392)의 도읍지로 문화유적이 많은 도시입니다. 예로부터 부소갑이나 송악, 개주, 개경, 송도 등으로 불리기도 했죠.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측의 철원과 연천, 파주 등과 접하고 있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는 김포와 강화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판문점에서는 겨우 10km거리에 있으며 한국전쟁 때 최초의 휴전회담이 열린 곳이기도 한데, 그 회담이 열린 장소가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개성의 면적은 1,200㎢로 남측의 ‘시’ 정도 규모이고, 인구는 약 40만명 정도 됩니다. 개성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1세기 삼한시대에는 대방의 옛 터였고, 고구려 때에는 부소갑으로 불리었습니다.
6세기 중엽에는 신라의 영토가 되면서 송악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고려 태조가 935년 신라를 복속한 뒤에 국도가 되었습니다.
960년 광종 때에 개경으로 개칭되었다가 995년 성종 때에 개성부로 다시 고쳐졌습니다. 개성은 고려 때 국제무역항의 구실을 했던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가 가까이에 있어 일찍부터 상업도시로 발달했습니다. Korea라는 이름이‘고려’의 Corea에서 유래한 것은 다들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상재에 능한 개성인들은 전국의 행상을 조직화해서 서울에 송방(松房)을 두고 전국 시장의 경제권을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개성상인들은 서양보다 2백년이나 앞서 사개치부법이라는 독특한 복식부기와 어음을 창안하여 전파시키기도 했습니다.
개성은 한자어가 들어오기 전 고구려 때에는 동비홀이라 불리었습니다. 동비홀의 어원은 도비구루(두비구루)인데, 도비(두비)는“열다”, 구루는“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열린 성”“열려진 곳에 있는 성”이라는 뜻이지요. 고구려 때에 개성은 부소갑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부소갑은 부소산, 그러니까 송악산과 관련해서 나온 이름이지요. 송악산이 백제 때에는 청목산이나 청목령으로 불렸던 것도 푸른 소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고, 조선시대 흔히 쓰이던 송도, 송경이라는 이름들도 소나무가 많은 송악산을 끼고 있는 도읍지라는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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